'샤각 샤각 샤각 샤각’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손 놀림에서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 초월한 장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가 고객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을 땐 차라리 자신의 작품을 위해 몰입하고 있는 예술인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가위가 손에 익은 지가 어느 새 50 여년이 지났다. 눈을 감고도 가위질을 할 수 있을 만큼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는 지금도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고객마다 얼굴과 머리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깎아야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될 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정성을 쏟아 붓는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자신의 차례가 되면 말없이 이발 의자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그냥 내맡기기에 더욱 신경을 쓴다고 한다. 때론 어떻게 깎아달라고 주문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고 한다. 인터뷰를 위해 은혜이발관을 찾았을 때는 백인 남성의 이발을 마무리 하고 있었다. 자신을 론이라고 밝힌 미국인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이발사의 정성에 감동했다고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도 단골이 되었다고 한다.
소년 박호철은 경북 청도의 빈한한 농가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중학교에 합격하고도 학비가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가 지인의 말을 듣고는 작고 낡은 반 바지 차림으로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도회지라곤 가까운 대구 조차도 가본적이 없던 그에게 서울은 거대한 공룡같은 도시였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린 나이에 감당키 힘든 무지막지한 고생뿐이었다. 그는 당시가 생각나는 듯 눈시울이 붉어지며 손등으로 눈 주위를 훔쳤다.
당장 먹고 잘 곳이 필요했던 그는 용산 경찰서 옆에 위치한 시발택시 공장에서 막일을 하며 지냈다. 그곳에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질 않자 이발소 견습생을 채용한다는 말을 듣고 남산 아래 해방촌의 판자집으로 옮긴다. 말이 견습생이지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던 탓에 리어카에 드럼통을 실어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나르고 손님들 머리를 감기는 일이 전부였다. 이발 기술은 커녕 보수도 없이 잡일 만 하는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종로 3가의 창덕궁 앞에 위치한 이발소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이발 경험을 쌓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후 그곳에서 이발을 하며 4.19와 5.16을 경험했다는 그는 부산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후 이발소를 차려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다. 잠시 식당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이발 일은 숙명같은 것이었다. 고희를 넘긴 나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눈을 감을 때까지 이발을 할 생각이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배우진 못했지만 평생의 직업을 삼아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모두에게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장소에 개업을 한 이래 요금을 한번도 올리지 않은 그는 앞으로도 더 이상 이발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지금의 요금을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남은 생은 나보다는 누군가를 위해서 쓰고 싶다고 한다. 아무런 욕심도 없는 그는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 미국에 건너와서 번듯한 자신의 업소를 갖게 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라고 말한다.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오기 전까지는 연수 과정을 거쳐 새마을 지도자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그때의 새마을 정신을 통해 근검 절약과 부지런함이 몸에 배었다. 그 덕분에 수차례 서울 시장상을 비롯하여 구청장 감사장 등을 받기도 했다.
지난 해 시민권을 받아들고 다시 찾은 고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코끝이 찡했다는 그는 과거 어려웠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면서 문득 한국전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한국이 전쟁에서 패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오늘의 이러한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젊음을 바쳐 희생한 참전 용사들이 생각났다. 대부분 80을 훌쩍 넘긴 참전용사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발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들을 위한 무료 이발을 결심한다. 마침 미시간 재향 군인회장을 지낸 홍양희 씨에게 그러한 뜻을 전달하여 200여명의 참전 용사들에게 안내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이미 여러 명이 와서 고마운 마음으로 이발을 하고 갔다. 그는 “그 분들이 이발관을 찾으시는 한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여름에는 가족들과 함께 맥아더 장군의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라고 말하면서 그 일이 알려지는 것을 한사코 만류하는 그는 우리에게 진정한 감사와 보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
소년 박호철은 경북 청도의 빈한한 농가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중학교에 합격하고도 학비가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가 지인의 말을 듣고는 작고 낡은 반 바지 차림으로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도회지라곤 가까운 대구 조차도 가본적이 없던 그에게 서울은 거대한 공룡같은 도시였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린 나이에 감당키 힘든 무지막지한 고생뿐이었다. 그는 당시가 생각나는 듯 눈시울이 붉어지며 손등으로 눈 주위를 훔쳤다.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오기 전까지는 연수 과정을 거쳐 새마을 지도자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그때의 새마을 정신을 통해 근검 절약과 부지런함이 몸에 배었다. 그 덕분에 수차례 서울 시장상을 비롯하여 구청장 감사장 등을 받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