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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갈등의 싹을 품고 31대 회장단이 출범했지만 당장 문제가 불거지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31대 한인회가 출범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종현 회장과 모 주간지 사장과의 갈등을 알지 못했던 양영화 부회장은 임명이 되자마자 협조를 부탁하기위해 동 주간지 사장 내외와 점심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양 부회장은 주간지 사장으로부터 한인회는 뭐하러 들어갔느냐는 핀잔과 함께 자신은 김종현 씨를 회장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31대 한인회 또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양 부회장은 “다 좋은데 그렇다고 한인회를 방해하고 흔드는 일은 삼가달라”고 부탁하는 선에서 회동을 끝낼 수 밖에 없었다.
제 31대 한인회는 출범 후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며 하나씩 업무를 진행해 나갔다. 11월에 실시한 이동 민원영사 서비스에는 230여 명의 교민들이 여권 발급 등의 영사 서비스를 받았다. 이는 역대 서비스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른 아침부터 민원인들이 몰려와 문화회관은 어느새 북새통을 이루었다. 시카고 영사팀과 함께 민원인들의 안내와 업무 보조를 하던 한인회 임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각자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계획했던 시간을 훨씬 넘겨 저녁 늦게까지 업무가 이어지기도 했다. 업무를 모두 마친 후 영사팀이 한인회 임원들과 함께 간단한 저녁식사를 끝내고 시카고로 향했을 때는 밤 10시가 훨씬 넘었다. 박봉수 동포담당 영사와 함께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두 행정관은 한인회 임원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해 겨울 디트로이트 시장은 추수감사절 터키 증정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한인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간담회를 갖기로 했다. 당시 터키 증정행사 주관을 한 미시간 상공인협회는 김종현 회장과 이종효 이사장 김종대 문화회관 이사장 등에게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락을 받은 김종현 회장은 회장단이 함께 참석하길 원했고 조미희 상공인협회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김 회장은 동 간담회에 신태영 공보부장을 대동하길 원했다. 그러나 조미희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절대불가의 입장을 통보하였다. 그러자 신태영 씨는 당시 동아일보의 객원기자 자격으로 자신이 직접 디트로이트 시장 비서실에 이메일을 보내 초청장을 받아냈다. 오히려 디트로이트 시 입장에서는 가급적 많은 한인들이 참석해주길 기대했는데 한인 언론 관계자라고 밝힌 자가 자발적으로 취재 차 참석하겠다는 연락을 받고는 전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해서 김 회장을 비롯한 회장단과 신 씨 등 일행은 당일 시장실 앞 로비에서 간담회를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이 때 먼저 와있던 모 주간지 사장이 비서실에서 나오다가 신 씨를 보더니 비서실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곤 잠시 후 비서실 직원이 나와서 신 씨에게 초청장 발송 과정에 업무 착오가 있었다며 간담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하였다. 시장과의 간담회는 사적인 모임이므로 외부인은 출입을 삼가달라는 것이었다. 시장실에서 마련한 한인 사회의 대표들과의 간담회가 사적인 자리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모 주간지 사장의 계략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김 회장은 모 주간지 사장의 농간에 화가 난 나머지 그렇다면 자신도 간담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고 회의장 입장을 거부하였다. 비서실 직원은 물론 다른 초청인들도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여기서 31대 한인회와 타 단체와의 사이에는 분명한 온도 차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 시장실에 까지 와서 한인 사회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며 모 주간지 사장을 중심으로 한인회를 비난하는 인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한인회 측은 모 주간지 사장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비롯된 치졸한 행위로 인해 자칫 전체 한인 사회가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었다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모 주간지 사장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찌 되었든 디트로이트 시장의 초청으로 마련되었던 감사의 자리는 미시간 한인 사회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이 표출되고 마는 싸움터가 되었고 결국 고스란히 한인 사회의 치부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인 사회는 결정적으로 내편 네편이 나누어지게 된다. 그리고 당시의 앙금은 몇 해가 지난 뒤 까지도 가라앉지 않고 갈등을 고착화시키고 말았다. 그 일 이후 모 주간지 사장은 마치 상대방의 약점이라도 잡은 양 자신의 주간지에 연속해서 당시 상황을 기술하여 모든 책임을 한인회에 떠넘기는 등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사실을 왜곡하는 등 호도하기 시작했다. 한인회 또한 웹사이트를 통해 그날 일어났던 일들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는 한 개인의 그릇된 행위로 인해 전체 한인 사회에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며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인회장을 지냈던 황연행 씨는 당시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상태에서 특정인의 말만 듣고는 한인회를 폄하하는 글들을 모 주간지에 연속해서 올리는 등 부하뇌동하는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고 이는 결국 디트로이트 한인회 역사상 처음으로 징계를 받은 전직 한인회장이라는 불명예을 얻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