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앞에는 늘 휠체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휠체어 차인홍 교수가 미시간에서 감동의 공연을 펼쳤다. 본보 12월 22일자에 소개된 대로 지난 달 18일 디트로이트 한인 연합감리교회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클래식 음악회 공연에서 관객들에게 잊지못할 커다란 감동을 선사했던 것이다. 미시간 광장은 공연 직전 그와 만나 그의 드라마같은 삶을 들어보았다.
공연시간을 앞두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무대를 둘러보던 차 교수는 미시간 광장 취재팀의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수락을 하고 지나 온 삶의 여정을 되짚기 시작했다.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나 2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그 후 평생을 서서 걸어 본 적이 없는 그 앞에 서서 인터뷰를 한다는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차 교수는 밝은 모습으로 오히려 자신만이 앉아 있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듯 했다. 장애라는 아픔을 끄집어내야 하는 취재팀의 고충을 이해한 듯 차 교수는 “만약 내가 장애를 갖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내가 서서 걸어다녔다면 결코 음악가가 될 수 없었기에 지금은 장애를 안고 태어났음을 감사한다”고 덧붙이며 무엇이든지 편하게 물어볼 것을 주문하였다. 어린 시절 가난한 가정의 장애아로 자란다는 것이 가혹할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고통없이 사는 것만이 선은 아니라고 말하는 차 교수는 “지금의 나처럼 간증거리가 있는 삶도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며 미소 짓는다.
차 교수는 24세가 될 때까지 정규교육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다. 재활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배운 것이 전부였다. 어린 시절 가난과 장애로 생을 포기하려는 생각도 수 차례 했다. 희망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처지에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할 뿐이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순간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런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만남의 주인공이 재활원 자원봉사 바이올린 선생님인 강민자 씨였다. 이 후 차 교수에게 음악은 삶의 의미이며 전부가 되다시피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연습을 하였다. 칼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에 연습할 곳이 마땅치 않아 연탄광에서 값싼 바이올린을 붙잡고 켜고 또 켜고를 반복하며 가난과 배고픔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마침내 장애우들로 구성된 베데스다 4중주단이 창단되었고 차 교수는 그 때 또 한번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아내 조성은 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조성은 씨는 헌신적인 희생을 통해 차 교수를 포함한 4중주단 전원이 검정고시에 합격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차 교수는 이제 희망을 보았다.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꿈은 꾸는 자에게만 이루어진다. 차 교수는 주위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이라는 기적같은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뉴욕시립대학의 브룩클린 음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마침내 83대 1의 경쟁을 뚫고 오하이오주에 있는 라이트 주립대학의 교수가 된 것이다. 음악을 통해 꿈을 꿀 수 있었고 마침내 꿈을 이룬 차 교수는 자신의 주변에서 도움을 준 모든 이들을 천사라고 말한다. 천사들이 짚더미 속에 버려진 자신을 이끌어 오늘의 모습을 이루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제 차 교수는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언제 어디든 그의 연주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마다않고 달려간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애를 쓴다. 희망이 없고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강조하며 ‘꿈의 전도사’역을 자청한 것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음악회에서도 그랬듯이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혼이 실려있는 그의 음악에 콧등이 시큰거리는 짠함을 느낀다. 그의 질곡의 삶을 토해내는 온 몸으로의 연주에 넋을 잃는다. 그런 속에서 꿈과 희망의 메세지를 듣게 된다.차 교수의 삶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2001년 KBS의 다큐멘타리에 그의 삶이 방영되었고 언론들도 앞다투어 보도를 하였다. 어느 새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2006년에는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재외동포 유공자상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차 교수는 겸손이 몸에 벤듯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마치 처음 인터뷰를 하듯 성심으로 임해주었다 .
차 교수는 음악뿐 아니라 스포츠에도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 각종 장애인 대회에서 금, 은, 동메달을 수상했으며 올림픽에서 대회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미국에서 휠체어 농구팀에서 활약하기도 했으며 한국에서 있었던 제 1회 전국 장애인 체육대회에서 마라톤 부문 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장애가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한다.
가족 얘기를 할 때 차 교수의 눈가에는 또 한번 이슬이 스쳤다. 특히 아내의 사랑과 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오늘의 자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음악을 전공한 아내 조성은 씨는 7년간 연애를 해온 차 교수와의 사랑을 이루기위해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핸드백 하나 달랑 들고 대전의 집에서 서울에 다녀온다고 말하고는 그 길로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부잣집 딸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조 씨는 미국에 와서 차 교수와 결혼식을 올린 후 가발공장, 재봉일, 피아노 레슨 등 온 갖 일을 해내며 차 교수의 유학을 도왔던 것이다. 차 교수는 앞으로 남은 삶은 아내에게 감사하고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차 교수는 사랑하는 아내와 진, 용 의 두 아들을 두었다.
공연 준비를 위해 인터뷰를 끝낼 수 밖에 없음을 아쉬워 하며 인사를 건낼 때 차 교수의 마지막 말이 귓전 파고 들어 계속 여운으로 남았다.
"나는 내 생애의 어느 한 부분도 고생담으로 비쳐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고생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사랑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크리스마스 클래식 연주자들과 함께, 좌로부터 재비스랙 교수, 신원경 씨, 주재희 씨
